오랜만에 루사파(Ruzafa, 발렌시아어 Russafa)에 있는 헌책방 미란푸(Miranfú)에 들렀다. '미란푸'는 까르멘 마르띤 가이떼(Carmen Martín Gaite, 1925-2000)의 소설 ≪맨해튼의 빨간모자 Caperucita en Manhattan≫(1990)의 주인공, 4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한 상상력이 풍부한 사라 앨런이 혼자만 뜻을 알며 만든 낱말 중에 하나이다. 미란푸는 소설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무언가 색다른 일이 생길 거야, 또는 내게 놀랄 일이 생길 거야 «miranfú» quería decir «va a pasar algo diferente» o «me voy a llevar una sorpresa»"란 의미이다.


늘 다니던 거리, 새로운 것이 별로 없는 곳, 서점 옆에 맥주집, 길 건너에 금요일이면 포도주를 시음할 수 있는 지방 포도주, 맥주, 사과주 등 주류와 특산품 판매점, 이 가게 옆에는 미니 피자(Little Pizza) 가게, 위로 좀 더 가면 가끔 들려 달달한 시나몬 롤(rollo de canela)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마스 보니따(Más Bonita))가 있다. 책이 쌓여 밀림으로 변한 서점에서 누렇게 변한 옛날 만화책 몇 권 구경만 하고 나왔는데, 모퉁이에 한결같은 키가 큰 나무가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네이버(엣센스) 스페인어사전이 '판야과의 나무'라고 번역한 palo borracho이다.

'판야'는 열매가 솜 같아서 면솜으로 사용했던 열대지방의 양목면(kapok 케이폭 Ceiba pentandra) 나무를 한자로 瓣蕊(판예)라고 적고 일본이 이를 パンヤ(판야)라고 읽은 일제강점기의 독법에서 유래한 말이다. palo borracho는 가을이면 분홍색 꽃이 피고 열매가 익으면 벌어져 이 양목면처럼 하얀 솜 같은 섬유질을 흩날린다. 현재 이 나무들은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처럼 아욱과에 속한다.


palo borracho는 문자 그대로 '술취한 borracho 막대기 palo 즉 '곤드레만드레 취한 나무'란 뜻이다. 나무가 술을 마실 리 없지만 굵은 줄기가 배가 불룩한 술통처럼 불거져 있다. 루사파는 발렌시아시에서 '먹자마시자놀자'로 유명한 유흥 지역이라 맥주, 상그리아, 아구아 데 발렌시아(agua de valencia)*가 배에 가득할 것 같다. 사실 배불뚝이 줄기는 가뭄에 대비해 저장한 물 때문이다.

*agua de valencia(문자 그대로 뜻은 발렌시아의 물)는 발포성 포도주(sparlking wine = vino espumoso = cava), 오렌지즙, 보드카, 진, 설탕을 섞은 칵테일이다.

palo borracho는 스페인의 자생식물이 아니라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페루, 아르헨티나 북부 등이 원산이다. 언제 여기에 심었을까. 루사파는 발렌시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비센떼 블라스꼬 이바녜스(Vicente Blasco Ibáñez, 1868-1928)의 소설 ≪갈대와 진흙 Cañas y barro≫(1902)의 주인공 또넷(Tonet)이 쿠바전쟁에 참전을 지원했던 모병실이 있던 군대가 있을 때는 논, 밭, 과수원, 바라까 집이 가득한 농촌이었다.

1980년대 후반 모로코 등에서 이주해 온 아랍어를 쓰는 무어인이 거주하자 일부 스페인 토박이가 떠났지만 청과물 및 식료품점(ultramarino), 신발가게(zapatería), 신발수선점(zapatero), 차수리소(taller de coches), 금은방(joyería), 철물점(ferretería), 바느질집(costurera), 옷가게(tienda de ropa), 가구점(tienda de muebles), 세탁소(tintorería), 정육점(carnicería), 전통 빵집(horno), 전통 바(mesón, bar), 선술집(tasca), 잡화점(mercería), 소파, 의자 천이나 가죽 갈이점(tapicería), 책방(librería), 문방구(papelería) 등 소매 가게들이 즐비했다. 2000년 후 관광객을 위한 자전거 대여점, 메르까도나(Mercadona)와 꼰숨(Consum) 같은 중형 슈퍼마켓, 중국인이 경영하는 가게 앞에 식물 화분을 전시해두고 들어가면 플라스틱인지 공업 화학품 냄새가 코를 찌르는, 저렴한 문방구, 주방용품, 철물, 장난감, 생활용품, 양말, 가방, 액세서리 등을 파는 중대형 잡화점(bazar chino이지만 보통 chino라고 함), 길거리에 탁자와 의자를 놓은 먹거리와 마실거리를 제공하는 카페, 바, 식당과 1층을 개조한 관광객 숙소 따위로 변하기 시작해 지금은 저녁이면 시끌벅적 북적거리며 음식값이 비싼 필요악의 명소이다.

이곳에서 스페인 사람, 무어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관광객들과, 쓰레기통을 뒤지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 동유럽 이민자와 스페인 집시들, 관광객들에게 천팔찌나 가죽끈팔찌(pulsera de tela o cuero) 등 물건을 파는, 빠떼라(patera)나 까유꼬(cayuco) 같은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에 상륙해 거주를 허락받은 검은 피부의 불법이민자들을 지켜봤을 나무, 가끔 나도 보았을 텐데, 잘 컸다.



palo borracho의 라틴어 학명은 Ceiba speciosa (A.St.-Hil., A.Juss. & Cambess.) Ravenna.,1998이다. 속명 ceiba는 카리브해 지역의 원주민인 타이노족 또는 카리브족의 언어로 '큰 나무' 또는 '배(카누)'에서 유래했다. 종소명 spaciosa는 '화려한' spaciosus의 여성 형용사이다. 높은 나무에서 연분홍색 꽃과 솜이 날리는 것이 수려하기 때문이다.

palo borracho를 '아메리카 땅의 솜을 생산하는 나무'라는 뜻의 중국어 '미주목면'처럼 '양목면'의 일종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아니면 쉬운 우리말로 '솜나무'라고 하든지.


하지만 원주민의 말을 반영하여 '카누나무'라고 명명했다. 카누를 타고 사라 앨런이 미란푸를 되뇌며 하몬처럼 생긴 맨해튼을 벗어나 넓은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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