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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엘 오에스떼 공원의 식물

by 엣센스 스페인어사전 뜻풀이 수정 2026. 7. 16.

한여름이다. 40도를 오락가락한다. 너무 덥다. 햇살이 뜨겁다. 이렇게 뜨겁게 환한 여름이 절정일 때, 이 환희의 순간에 난 늘 추락과 바닥을 먼저 떠올린다. 얼음 위에 얼음이 켜켜이 언 너테의 겨울이 항상 생각난다. 계절성 정서장애가 아니다. 이러다가 떨어질 텐데. 아프고 슬플 텐데.  양극단의 감정이 요동치는 양극성장애도 아니다. 쇼팽의 왈츠 34-2, A단조, '화려한 왈츠'처럼 눈부시게 어둡고 우울하다. 곡은 21세의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살던 쓸쓸한 속내를 담고 있다. 

피아노 임윤찬, 쇼팽 왈츠 34-2

일요일 오전에 엘 오에스떼 공원(parque del oeste)을 다시 찾았다. 온두라스 파출부가 청소를 시작한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가지 않은 것이 좋다고 했으나 정확하게 그 말에 반해서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에는 집시들이 있어 외국인인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논리다. 북쪽의 수영장 입구의 도로 건너편은 독재자 프랑꼬가 70년대에 집시들에게 하사한 집들이 있지만, 이 집에는 집시 이외에도 아프리카, 남미, 인도, 파키스탄 이민자들, 물론 스페인 원주민도 산다. 그들이 날 위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는 배경이 공원이다.

아베니다 델 시드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봄에 향기로운 꽃이 떨어지고 초록색 열매를 단 운향과의 광귤나무 naranjo amargo(Citrus × aurantium L.)가 즐비해 있다. naranjo amargo는 문자 그대로, '쓴 오렌지나무'란 뜻이다.

왼쪽은 공원 담장, 광귤나무에 초록색 열매가 달려 있다.

광귤나무는 발렌시아 시내 거리에 흔한 가로수이다. 겨울이면 열매가 오렌지 마냥 노란색으로 탐스럽게 익는다. 아무도 따지 않는다. 너무 쓰고 매연에 노출되어 껍질은 중금속 범벅이니까. 옛날에는 세척해서 영국 등에 잼의 재료로 수출했지만 요즈음은 그냥 버린다. 봄이면 시청은 열매를 수거하는 데 장비와 인력을 투여한다.

 

지저분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공놀이 금지, 자전거 출입 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고 그 아래 덕지덕지 딱지가 붙은 표시는 무엇을 뜻하는지. 오른쪽 기둥의 상단에 흰색 안내문은 공원 개폐시간이다.

일요일 11시 공원은 조용하다. 입구를 지나자 키 작은 광귤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왼쪽에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콩과의 수양회화나무 sófora llorona가 줄지어 있다. sófora llorona는 글자 그대로 '우는 회화나무'이다. 아래로 늘어진 가지가 흐느끼는 듯 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와 일본 등의 귀화식물인데, '화화'는 그림이 아니라 귀신을 부린다는 '괴(槐)화'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어 잡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중국이나 한국에는 동네 입구와 서원 등에 심었다. 그래서 영어로 Chinese scholar tree(중국 학자 나무)이다.

좌 수양회화나무, 우 자카란다
회화나무 학명 Styphnolobium japonicum 'Pendula'  (L.) Schott

키 작은 광귤나무 길 끝에는 운동 기구들이 있다.

운동기구는 자카란다가 늘어선 다른 길 곁에 있다. 보라색 꽃이 지고 갈색 열매주머니를 단 능소화과의 자카란다 jacaranda(Jacaranda mimosifolia D.Don)가 길 양쪽에 있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옛날처럼 매트를 깔아 놓고 근력운동을 하고  숨이 차도록 달리기 등 운동을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있다. 겨우 한다는 게 걷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2시간 걷기가 전부이다. 

자카란다 나무 그늘 아래 노부부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 나이가 되면 난 누구하고 걷고 있을까. 

자카란다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남미가 원산지인데 발렌시아 시내 곳곳에 심어져 있다. 아르헨티나는 선제골을 넣고 수비 전술을 쓴 잉글랜드를 2-1로 물리치고 이번 일요일 스페인과 우승컵을 두고 격돌한다. 메시는 역시 메시였다. 심판이 공정하다는 전제 아래 메시를 어떻게 막느냐가 스페인의 승패가 달려있다. 

놀이터로 가는 길옆 벤치에 중년 여성이 책을 읽고 있고 조금 떨어진 벤치에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공원의 모습이다. 

울타리 뒤에 버드나무과의 이태리포플러 chopo candiense(Populas x canadensis Moench)가 있다. 양버들 álamo de Italia(Populus nigra var. italica Koehne)과  스페인어 명칭이 헷갈린다.  서울대 스페인어사전은 álamo de Italia를 이태리포플러로 착각했다. 이태리포플러 chopo candiense는 양버들과 북미가 원산지인 미루나무의 자연교배종이다. 양버들은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만 이태리포플러는 옆으로 퍼져 있다. 

양버들은 내 유년의 나무이다. 한국 시골 고향의 할아버지 댁에서 나른한 여름 오후를 보냈던 어린 내가 생각난다. 어른들은 모두 밭과 논으로 나가고 혼자 마루에 앉아 냇가를 낀  한길에  양버들 높이 만큼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검은 자동차, 무슨 일이지. 무얼 조사하러 왔을까. 막걸리 밀주를 단속하러 온 공무원일까. 장독대 근처 땅밑에 묻어둔 할아버지의 농주, 짚을 치우고 뚜껑을 열면 부글부글 새콤달콤한 뿌연 막걸리 냄새. 이태리포플러 가지가 구수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길과 눈매처럼 일렁거렸다.

 

이태리포플러 오른쪽으로 아이들 놀이터가 있다.

놀이터, 왼쪽에 퀸야자가 보인다

놀이터 뒤에는 콩과의 유다나무 árbol de Judas = ciclamor = árbol del amor 사랑 나무(Cercis siliquastrum L) 있다. 나뭇잎이 심장 모양이라 사랑의 나무이다.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목을 매어 죽은 나무라는 설이 있어 유다나무이기도 하다. 원래 꽃이 흰색이지만 유다의 배신과 죽음이 창피해서 붉은빛이 되었고 한다. 한국에는 박태기나무(Cercis chinensis Bunge)가 있다. 이른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분홍색 꽃부터 피는 나무이다. 피기 전 다닥다닥 붙은 통통한 꽃이 밥알 같아서 방언으로 '밥티기'이다가 박태기나무가 되었다.

꽃이 지고 갈색의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놀이터를 지나 야자나무가 있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장미 화단이 있다. 사향장미인가, 프랑스장미인가, 개장미인가 자세히 보지 않았다. 화단 건너 야자수가 있는 광장이 있다. 멕시코부채야자 palmera de abanico mexicana(Washingtonia robusta)가 있는 광장의 차양 아래 벤치도 있다.

왼쪽 담장 너머에는 수영장이 있다.

멕시코부재야자가 있는 분수대의 광장 서쪽으로 공원은 다른 풍경이다. 나란히 선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와 어린 소나무 서쪽으로 숲이 있다. 

서쪽에는 올리브나무 숲이 있다.

아, 오늘 점심은 뭘 해먹지? 닭가슴살이 있으니 산하꼬보(sanjacobo)를 하자. 산하꼬보는 스페인의 돈가스인데, 오늘은 돼지등심 대신 닭고기로 한다. 얇게 썬 가슴살에 치즈 한 조각을 넣고 반으로 접어 소금 간을 조금 해 전분 가루를 입혀 달걀물에 적셔 빵가루를 입혀 자글자글 구우면 된다. 애호박을 채 썰어 볶고 싱싱한 루콜라(애벌레냉이)에 비르헨 엑스뜨라 올리브 오일을 쳐서 곁들여 먹으면 된다. 날도 더운데 적포도주에 얼음을 띠우고 탄산수를 섞은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 또는 레몬과 오렌지 즙을 짜서 넣고 복숭아와 키위를 썰어 넣은 나름대로 상그리아(sangria)와 먹으면 시원하고 좋아. 돌아올 때 물 한 팩을 사오라고 했다. 메르까도나 슈퍼보다 가까운 꼰숨에서 사야겠다. 아니 더 가까운 파키스탄인 과일가게에서 사야겠다.

지중해쥐엄나무 algarrobo(Ceratonia siliqua L.)이다. 지중해 연안의 유럽,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가 원산지이다. 캐럽나무라고도 한다. 8월 이후 꽃이 필 때 꽃구경을 와야겠다. 

마편초과의  금방울 gota de oro(Duranta erecta L.)이다. 남미가 원산지인데 공원에 심어져 있다. 보라색 꽃이 지면 노란색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gota de oro이다. 이 단어는 DRAE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원산지인 무환자나무과의 jabonero de la China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 Laxm.)도 있다.  jabonero de la China는 문자 그대로 '중국의 비누'란 뜻이다. 사포닌 성분이 있어 물과 마찰을 하면 거품이 생긴다. 

화단에는 꿀풀과의 라벤더와 세이지가 있다. 

아래는 세이지 salvia(Salvia officinalis L)이다. 세이지는 살비아라고도 한다. 잎에 좋은 향내가 난다. 세이지의 속명 salvia는 라틴어 salvus(건강, 안전)에서 유래했듯 몸에 좋은 허브이다. 세이지속은 전세계적으로 1041종이 있는데 한국에는 배암차즈기, 단삼, 개꽃, 살비아 등 6종이 있고 스페인에는 26종이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나팔꽃협죽도 Cascabela thevetia (L.) Lippold도 있다. 꽃이 나팔 같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스페인어로 codo de fraile(수도사의 팔꿈치)라고 하는데 씨앗이 각이 져 있어 수사의 팔꿈치를 닮아서 이름이 유래했다. 꽃이 노랗다고 adelfa amarilla(노랑협죽도)라고도 한다. 

공원 서쪽 끝에는 소나무가 있다. 알레포소나무인지 유럽흑송인지 나중에 자세히 봐야겠다.

엘 오에스떼 공원은 옛날 공군기지였다.

일요일이라서 공원에서는 아이들 생일 파티 등 다양한 모임이 있었다. 서쪽 출입구로 빠져나오는데 남미 사람들이 야유회를 하고 있었다. 노래를 틀어 놓았다. 로제와 부르노의 <APT 아파트>가 흘러나왔다. 

공원 옆의 경찰서와 지하철 역